1. 줄거리
영화는 경성 제일의 기생 학교 '대성권번'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빼어난 노래 실력을 가진 어린 소율은 선생 산월의 총애와 함께 생활하는 다른 기생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다 인력거꾼이 도박빚을 져 어린 딸을 기생집에 팔아버리는 장면을 목격한 소율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소녀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고 살뜰히 도와줍니다. 가시꽃처럼 날카로웠던 그 아이의 이름은 연희. 시간이 지나 어엿한 아가씨가 된 두 소녀는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습니다. 졸업시험에 나란히 최고 등급인 붉은빛 우산을 받은 두 사람은 초일기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의 가장 앞에 서는데, 선생인 산월은 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줄을 선 기생들에게 말합니다. 예로부터 기생이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어화'라고 불렸으며,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뿐 아니라 신분은 미천하지만 학문과 예술을 알아 예인으로서의 높은 기량을 이루면 어떠한 고관대작도 그 앞에서 눈과 귀를 여는 고귀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율은 가장 좋은 성적으로 대성권번을 졸업하고 기생은 예인이라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습니다. 정가가 아닌 가요가 경성을 휩쓸었고 소율과 연희도 그 흐름에 빠르게 빠져들었습니다.
어느 날 소율을 찾아온 양장을 한 사내의 이름은 윤우. 두 사람은 꽤나 오래 만나온 사이인 듯 보입니다. 그는 소율과 함께 밤거리를 거닐며 가볍게 말합니다. '2년이면 되겠지? 내 색시.' 새침하게 웃은 소율은 말을 돌리며 유리창 안에 진열되어 있는 이난영의 음반에 눈을 돌립니다. 소율은 윤우에게 이난영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늦은 밤이 돼서야 돌아온 소율을 권번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연희는 소율을 나무라지만 소율은 윤우에게 연희를 '둘도 없는 동무'로 소개해줍니다.
다음날 자동차로 권번 앞으로 온 윤우는 친구네 집으로 간다며 무작정 소율을 데리고 어딘가로 달립니다. 소율은 처음 가본 집에서 자신이 내내 존경해 오던 가수 이난영을 만납니다. 사실은 '친구네 집'이 이난영의 집이었고, 윤우는 최치림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히트곡의 작곡가라는 것을 알게 된 소율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난영은 어린 나이에 정가 명인이 된 소율의 노래가 궁금하다며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소율은 정성스럽게 정가를 불러줍니다. 소율은 연희에게 난영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전화를 걸어 그녀를 급히 불렀고, 자신은 놀음 때문에 돌아가면서도 연희는 그곳에 남아 난영을 만나고 오라고 떠밀며 윤우에게 연희를 부탁합니다.
다음날에도 윤우는 소율을 찾아옵니다. 둘은 장터를 거닐며 얘기합니다. 나중에 자신의 노래를 꼭 불러달라고 능글맞게 말하는 윤우에게 소율은 자신이 무슨 가수냐며 그래도 정가가 제일 좋다고 말하지만 윤우는 자신은 이 시대의 아리랑을 만들 거라고 말합니다. 한가하게 음미할 노래가 아니라 지치고 힘없는 자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주는 노래. 윤우는 소율과 헤어지기 전에 이난영의 음악회 티켓을 선물합니다. 멀어지는 윤우에게 오라버니가 만든 노래를 꼭 부르고 싶다고 말하는 소율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준 윤우. 그리고 소율은 떨리지만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고 웃으며 돌아섭니다.
소율, 윤우 그리고 연희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난영의 음악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난영은 최근 어떤 한 아가씨의 노래를 듣고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좋았다며 노래를 다시 한번 들려주기를 청하며 소율이 아닌 연희의 이름을 부릅니다. 기쁨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세 남녀의 감정이 파도칩니다.
2. 등장인물
1. 정소율
- 아름다운 미모와 창법을 가진 대성권번 최고의 예인으로, 그 당시 신문에 가장 크게 얼굴이 실렸을 정도로 대성권번이 배출한 최고의 기녀임에도 윤우를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줍니다. 소율은 타고난 실력을 가진 데다 따뜻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가수가 되겠다며 음반 작업을 하는 연희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끝까지 지지해 주는 것과 윤우를 믿어주는 것만 봐도 그녀의 원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조금 차가워지고 비뚤어지지만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감정 이입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2. 서연희
-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준 윤우의 말을 듣고 권번을 나와 유행가 가수가 됩니다. 어린 시절의 성격은 가시 돋친 꽃처럼 차가웠지만 자신을 품어주는 소율을 만나 동무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하나뿐인 동무의 연인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3. 김윤우(최치림)
- 이 시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소율의 옛 연인. 소율만을 가슴에 품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마음은 연희와 사랑에 빠지자 풋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소율이를 위해 '복사꽃'이라는 노래를 만들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정작 '가시꽃'이라는 노래를 작곡하며 자신이 연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소율을 모두 잊은 것처럼 연희와 정식 연인이 됩니다.
3. 총평
영화를 보며 사랑의 맹세와 약속은 한순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빠져든 사랑이라지만 둘에게 가장 소중했던 소율이는 왜 끝까지 배신만 당해야 했을까요. 소율은 끝까지 자신의 가장 친한 동무인 연희와 자신의 첫사랑인 윤우를 믿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윤우가 소율이에게 고백했던 마음은 스치듯 지나가는 풋사랑이고 가볍게 한 맹세였지만 소율은 자신이 망가져 가면서도 윤우만을 끝까지 사랑했던 모습도 아프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윤우는 그런 소율에게 진심을 다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곡을 써줍니다. 제목은 '사랑, 다 거짓말'. 늙은 소율이 방송에 나와 연희 행세를 하는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시대적으로 봤을 때 소율이 옳은 길로 간 것은 아니지만 한 여자의 인생으로 보았을 때 복사꽃 같이 활짝 피었던 소율이 믿었던 두 사람에게 배신당한 이후 점점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인생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연우와 연희가 얼마나 죽고 못 사는 사랑을 했는지는 사실은 크게(전혀) 감정이입을 못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토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전후사정도 개연성도 없을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저는 이 영화에 수록된 모든 곡을 통틀어 소율이가 부른 '사랑, 다 거짓말'이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곡이자 가장 가슴을 울리는 곡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43년 판 '흔들린 우정'이자 한 기생의 삶을 비춰본 영화 <해어화>였습니다.